요즘, 그림 앞에 오래 머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어쩐지 미술관만큼은 자꾸 찾게 되더라고요. 올해는 유럽 화가들의 전시가 정말 풍성해서인지, 더 자주 발걸음이 향하는 것 같아요.
고흐, 모네, 클림트. 이름만 들어도 뭔가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그 화가들. 한 번쯤 그들의 작품을 보고 괜히 울컥했던 적, 있으시죠?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오늘은 그 감정들을 나누고 싶어 이렇게 글을 씁니다.
■ 전시회,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느끼는’ 시간
며칠 전,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반 고흐 인사이드’ 전시에 다녀왔어요. 솔직히 말하면, 기대 반 걱정 반이었죠. 디지털 기술로 표현된 고흐의 작품이 과연 진짜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요,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길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특히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천장과 벽 전체를 채우던 순간, 마치 그 소용돌이치는 하늘 속에 제가 빨려 들어간 기분이었달까요? 그림을 본다기보다는, 고흐의 마음을 잠시 빌려 느끼는 느낌이었어요.
해외에서도 올해는 유럽 거장들의 전시가 유난히 많습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모네의 특별전이 한창이고, 빈의 벨베데레 미술관에서는 클림트의 황금빛 세계가 관람객을 사로잡고 있다죠. 제가 지금 당장 비행기를 탈 수 있다면, 첫 목적지는 아마도 빈일 거예요. 클림트의 ‘키스’, 원화로 꼭 보고 싶거든요.
■ 이 화가들, 왜 아직도 우리 마음을 흔들까요?
생각해 보면 좀 신기하지 않나요? 고흐는 100년도 넘게 전에 살았고, 피카소도 20세기 초반의 인물인데… 왜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그림에 끌릴까요?
고흐는 말 그대로 ‘감정의 화가’였죠. 저는 그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조금 불편해요. 그 눈빛이, 뭔가 말을 건네는 것 같거든요. 슬프면서도 강한, 그런 에너지가 있어요. 혹시 그런 감정, 느껴보신 적 있으신가요?
르누아르도 참 다정한 화가예요. ‘그네’라는 작품을 보면, 정말 봄바람 부는 어느 오후의 향기까지 느껴진달까요? 그냥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져요. 이런 게 아마 예술의 힘이겠죠.
그리고 피카소. 참 어려운 화가지만, 동시에 너무 솔직한 작가예요. 형태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하는 방식은 마치 인간의 ‘내면’을 다시 조립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가 표현한 혼란스러움이,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건 저뿐일까요?
■ 유럽 화가들, 예술을 넘어서 삶에 영향을 주다
한 번은 친구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요즘은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그림을 닮고 싶다”고요. 그 말이 참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유럽 화가들의 작품은 이제 단순한 ‘작품’이 아니에요. 우리의 일상 속에 들어와 있고, 누군가의 감정 속에도 남아 있습니다.
클림트의 ‘키스’는 커플의 상징처럼 쓰이고,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은 패션 아이템에서부터 광고, 영상 디자인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예술은 감상하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것’이구나.
SNS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고흐의 그림을 패러디하거나, 모네의 색감을 재해석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예전엔 미술관에서만 보던 화가들이 이제는 우리가 입고, 듣고, 누리는 곳곳에 녹아 있다는 사실. 참 놀랍고도 멋진 변화 아닐까요?
■ 마무리하며 – 예술은 결국 ‘내 얘기’였구나
2025년, 유럽 화가들의 전시는 단지 ‘구경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에게는 이 그림들이 어느 순간부터 ‘위로’로 다가왔거든요. 감정을 꺼내볼 틈이 없던 나날들 속에서, 한 장의 그림이 조용히 말을 걸어왔어요. “괜찮아, 너의 감정도 예술이야”라고요.
혹시 요즘, 이유 없는 피로감이나 감정의 무력함을 느끼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이번 주말엔 가까운 전시회 하나쯤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고흐의 하늘 아래서, 피카소의 혼란 속에서, 모네의 햇살 아래서… 어쩌면 당신만의 감정을 다시 만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