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예술은 삶의 일부라는 철학
예술을 국가 차원에서 ‘존중’하는 나라가 있다면, 프랑스가 그 대표격일 것입니다. 프랑스는 예술을 단순한 창작의 결과물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예술은 국가 정체성이고, 시민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문화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프랑스는 예술가에게 안정적인 활동 기반을 마련해주는 제도적 뒷받침이 상당히 탄탄합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인터미탕(intermittents du spectacle)’ 제도입니다. 일정 기준 이상 예술 활동을 해온 사람이라면, 일정 기간 동안 실업급여 형태의 생활비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제도는 연극, 무용, 음악뿐 아니라 시각예술 분야의 작가에게도 적용되며, 화가들이 경제적 압박 없이 실험적인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또한 프랑스 문화부는 매년 수백 건에 이르는 창작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전시비, 창작비 등을 지원하며, 전국 각지에서 운영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작가가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과 여건을 제공합니다. 특히 지방에 있는 레지던스는 지역 주민과의 교류 기회를 제공해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고 있죠.
결국 프랑스의 예술정책은 ‘자유로운 표현’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합의이자 철학입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미술은 언제나 조금 더 실험적이고, 조금 더 진지합니다. 프랑스에서 화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아니라, 사회와 예술의 관계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 독일: 공공성과 체계로 무장한 예술 시스템
독일은 예술을 ‘공공재’로 봅니다. 그래서 예술에 대한 국가적 투자가 매우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뤄집니다. 예술가 개인의 창작뿐 아니라, 예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한 정책이 특징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연방정부, 주정부, 시 단위로 구성된 다층적인 문화예산 구조입니다.
대표적인 지원 제도는 ‘쿤스트펀트(Kunstfonds)’입니다. 작가가 본인의 작업 계획을 세부적으로 작성해 제출하면, 심사 후 창작비나 전시비를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행정적으로는 조금 까다롭지만, 그만큼 지원의 투명성과 신뢰성이 높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독일에는 예술가 사회보장제도인 ‘KSK’가 있습니다. 프리랜서 예술가도 건강보험과 연금에 직장인 수준으로 가입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일부 금액을 보조해주는 시스템입니다. 예술가가 단지 창작에만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안전망이랄까요.
베를린, 함부르크, 쾰른 등 주요 도시들은 저마다 예술가를 위한 인프라가 매우 잘 갖춰져 있으며, 베를린은 특히 저렴한 생활비와 개방적인 분위기로 신진 작가들에게 ‘예술 실험의 도시’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체계적인 정책과 창작 환경이 균형을 이룬 독일, 그 속에서 화가들은 예술과 사회의 연결고리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 영국: 유연성과 자율성의 예술 생태계
영국은 프랑스나 독일과는 다르게, 민간 중심의 유연한 예술 지원 시스템이 돋보이는 나라입니다. ‘아츠카운슬잉글랜드(Arts Council England)’라는 정부 기관이 있긴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민간 재단이나 기업 후원, 크라우드펀딩을 통한 자금 조달이 더 일반적입니다.
이런 구조는 예술가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더 치열한 자기 홍보와 기획 능력을 요구합니다. 영국의 화가들은 전시뿐 아니라 자신의 포트폴리오 구성, SNS 활동, 갤러리 네트워킹까지 신경 써야 하죠. 그래서인지 영국 예술계는 ‘브랜딩’에 능한 작가들이 많습니다.
런던의 소호, 쇼디치, 해크니 등지는 팝업 갤러리와 독립 전시공간이 발달해 있어, 신진 작가들이 작품을 선보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합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에는 디지털 전시, NFT 작품 지원 등 새로운 예술 형식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빠르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유연한 생태계는 예술을 단순한 창작물이 아닌 ‘경험’으로 정의합니다. 작가에게는 조금 더 도전적인 환경일 수 있지만, 그만큼 자율성과 가능성도 함께 열려 있는 나라. 영국은 그런 공간입니다.
■ 결론: 예술을 키우는 건 제도이자 철학
프랑스, 독일, 영국. 각기 다른 문화와 제도 안에서 예술은 다양한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예술을 ‘복지’로, 독일은 ‘공공성’으로, 영국은 ‘자율성’으로 접근합니다. 그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점도 분명하죠. 바로 ‘예술가가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화가로 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세 나라의 제도는 단순한 지원을 넘어서 삶의 방식 자체를 제안합니다. 예술을 꿈꾸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결국 ‘버틸 수 있는 시간’ 아닐까요? 각국의 제도를 살펴보며, 창작을 위한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